느리게 걷는 것

일상의 발견 2009/10/25 11:48
출퇴근시 차를 이용해오다가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바꾸고 새삼스레 작은 변화들을 여기저기서 느낀다.
당초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지만 오가는 무수한 무표정한 얼굴들을 다른 자동차들 뒤꽁무니 대신 쳐다보게 된 것이며, 카드형 교통카드를 매번 가방에서 꺼내쓰는 것이 휴대폰 고리형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며... 아침 저녁으로 가로수의 낙엽을 밟으며 계절의 변화를 더욱 자주 쉽게 접하게 된 것 등등

얼마전 몸이 약간 아파 잠시 앓았었는데 그러고나서 몇 일간 나도 모르게 걸음이 많이 느려진 것을 느꼈다.
기운이 좀 없었나본데 정말 나도 모르는 새였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지나며 앞서가기 시작하면서 나는 갑자기 비디오카메라가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처럼 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식간이었고 신선한 느낌이었다.
순간 나는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았다.

대기업에서 주최하는 워크샵에 참석했다가 가정의학과 의사 한 분이 강연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TV 아침프로 등에서 각광을 받는 유명세를 타는 분으로 기억한다. 그 분의 얘기의 골자만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일상 생활 속에 실천 가능한 운동법, 건강한 습관 같은 것이었다. 유익한 내용이라 생각되어 열심히 들은 것 같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 중 아주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운동법 중 하나가 걷는 방법을 바꾸는 것인데, 아주 짧은 거리 사무실에서 화장실을 간다던가 주차장에 차를 향해 걸어간다든지 할 때 어깨를 펴고 빠른 속도로 씩씩하게 걸으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아주 좋은 습관이라는 것인데, 별도로 더 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얼마나 좋은 방법인가 싶어 귀가 번쩍 뜨였던 기억이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고 나서 어느 순간엔가 그것이 역으로 강박관념처럼 작용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왜 나는 이 짧은 거리를 걷는 것조차 이런 식으로 하며 지내야 할까?
같은 일도 뒤집으면 묘하게 상황이 바뀌는 법이다.
일석이조는 가끔 강박이 될 수도 있다.

도산공원 정문 앞에 '느리게 걷기'라는 이름의 카페가 떠오른다.
지금은 폴로 플래그십 스토어로 바뀐 자리인데 그 카페는 근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다.
또한, 느림과 게으름이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 조금 전 어쩌면 그런 흐름이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때에 나왔던 책도 그런 제목으로 있었던 것 같다. 내 책꽂이 구석 어딘가에 꽂혀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여행기 속 모든 걸 떨치고 훌쩍 떠나 낮선 이국의 거리를 한가로이 거닐며 사색에 빠지는 낭만을 좇아 서점의 여행기 코너를 맴도는 수많은 사람들도 떠오른다.

호젓한 거리를 느릿느릿 걷는 것은 내겐 그런 이미지이다.
느림의 철학이라는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러한 조류를 보며 막연하게만 느꼈다.
좋은 말인데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특별한 때가 아니면 바쁘게 걸으며 살수 밖에 없는걸...
이것은 물론 빨리빨리에 대한 피로감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
더 빨리를 외치며 어딘가로 달려가지만 결국 쳇바퀴를 도는 우리 삶에 대한 반감 정도 였다.
좋지 하지만 내가 이것을 어떻게 내것으로 만들어 볼지는 글쎄. 일요일 아침에나 어울리는 말이지.
라는 생각 정도였다.

느림이 주는 여유와 풍요로움은 과연 그렇게 특별한 곳, 특별한 순간에만 있는 것일까?

느리게 걷는 것, 느리게 사는 것.
스스로를 돌아보건데 무슨 생각에 골똘히 빠져있을 때나 무슨 충격적인 내용을 접해 깊히 몰입하거나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평상시 스스로 느리게 걸어 본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자발적으로 걸음을 늦춰보는 것.
이것은 우리의 선택권임에도 우리가 쥐어보지 못한 티켓같은 것은 아닐까?

사실 아무데고 아무 때나 걸음 속도를 늦춰보면 된다.
겪어보면 생각보다 많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훨씬 많이 보이고 훨씬 편해진다.
풍요로움까지는 아니더라도 훨씬 여유롭고 편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좋은 것은 짧게 지나가버리는 속성이 있다.
느리게 걷는 것은 그나마 그 속성도 늦춰주는 여운같은 것이 덤으로 있는 것같아 더욱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같다. 물론 언제나 느리게 다닐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걸음을 늦춰볼 수 있다는 것.
언제고 나를 느림의 세계로 안내해서 한 호흡 늦춰 여유를 주는 처방을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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