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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들여다보기 2009/12/19 14:46
부산에 출장을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공항 대기시간이 길어져 그 틈을 타서 순식간에 읽어 치웠다. 이 책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인물들에 대한 비범하지만 알고보면 평범한 이야기들.. 재미있었다. "김수정 휴먼에세이 -사람을 빌려서 책을 읽는다"는 부제가 붙어있는 책이다. 서점에서 처음 접하고, 사람을 빌린다는 은유적 표현이겠지했다. 다양한 사람들에대한 수필을 썼나보다 하는 생각으로 집어들었지만 막상 읽어보니 진짜로 사람을 책을 빌리는 것처럼 돌아가며 인터뷰하는 행사를 체험한 얘기였다. 참 신선한 발상이고 재미있는 개념이다싶다. 그게 잘 되려나? 하는 의심어린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평소 대중 매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접할 수 없는, 나와 너무도 다른 타인의 삶의 궤적과 모습을 직접 인터뷰해서 들여다 본다는 것.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어느정도 문화적으로 성숙되고 신뢰할만한 사회에서 가능한 행사가 아닐까 싶다. 우울증에 대한 얘기가 여러차레 나오는데, 문득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체에 대한 무수히 많은 병과 상처들을 치료하듯 정신도 끊임없이 병과 상처가 생기는데 그것이 눈에 찢어진 상처나 피로 보이지 않는다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과나 내과를 가듯 정신과를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위 민간요법이나 자가치료에만 주로 의존하는 낙후함을 유독 정신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영국같은 선진국은 정신과 치료가 유난히 일상화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지도 모른다. 정신과는 마치 미친사람, 뭔가 감추어야할 끔찍한 병이 불가피한 상황에만 발길을 두는 곳으로 생각해온 내 시각이 균형감이 없다는 생각... 내겐 하나의 깨달음이다. 정말 아플 때, 병원에 가야한다. 정신이건 신체이건...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저자가 정신분열증을 단지 정신적 요인이 주도적 영향을 주는 병으로 생각하는 인상을 받은 것. 내가 아는 바로는 뇌분비 이상의 요인이 더 주된 원인이다. 접근이 치우친 것 같다. 후미의 트랜스젠더 부분에서 그 당사자가 성전환 수술을 마치고 나오며 극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행복에 겨워 노래를 불렀다는 대목도 기억에 남는다. 문득, 평생 성형외과적 장애를 안고 살던 사람이 수술을 하게되어 인생의 환희를 되찾는 장면을 TV에서 보았던 게 이것과 일맥상통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전환을 원하는 이는 흉칙한 혹이 달린 몸을 안고 사는 듯 고통을 느끼고 살았던게 아닐까? 저자가 맨 마지막 부분에 돈을 거부하고 1년을 살기로한 사람이 가장 인상적이라며 Epilog로 지목한 것이 있는데 목적과 그 본질은 훌륭하지만 인터뷰 내용은 많이 아쉽다. 저자의 얘기만큼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얼마전 읽었던 "조화로운 삶"의 니어링 부부 얘기가 훨씬 와 닿는다. 물론 1년과 평생의 차이가 크겠지만... 어쨌든 이런 Living Library 참 괜찮은 것 같다. 한마디로 타인에 대한 편견을 되돌아 보게 해주는 딱 좋은 처방법이다. 우리나라는 안하려나? 드라마나 다큐같은 데서 보는 타인의 삶이 많은 간접 경험을 제공하고 있지만,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얘기나누는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이런 경험은 또다른 차원의 시야를 제공할 것이다. 책 중에 기억나는 멋진말. " 삶이란, 당신이 다른 계획으로 바쁠 때, 당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이다. -존레논-"
책꽂이 들여다보기 2009/10/14 21:14
2007년 가을 여러가지 문제로 마음이 어지러웠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가장 힘들게 느껴진 부분은 사람과의 관계가 주는 스트레스였었는데, 그 때 달라이라마에 대한 스테디 셀러 책 중의 하나인 '용서'를 샀다. 진정한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용서를 하는 본질을 알아야 하는 것인데. 책을 읽으며 그 본질에 접근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당시에는 책을 읽을 마음의 상태가 되지 못해 읽지는 않았었다. 이 후 어느 날 불현듯 다시 집어 들고 읽게 되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지은 '오래된 미래'와 같은 이름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달라이라마.
티벳의 전통 속에 어린 시절 다소 모호한 이유에 의해 선출되는 인상을 받고 있어 그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과는 무관한 위치에 올라간
사람이라는 인상이 있어 나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그가 위대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기도 했다. 하긴 세습되는 왕의 위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지도자로서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지 않은가? 그저 중국의 탄압 속에
상대적으로 유명해진 사람이 아닐까?하는 시각으로 무수한 매스컴의 내용들을 바라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그의 고뇌와 사상을 얼핏 느낄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용서는 단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처음 그냥 읽었을 때 그저 전형적인 격언같이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앞설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용서라는 개념의 차원을 분명하게 넓히고 깨닫게 해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용서'라는 말을 떠올리면 무조건 상대방만을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실은 용서에있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그 미움, 원망 이라는 내 안의 실체를 놓아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용서는 결국 상대와 나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용서는 상대에 대한 내 안의 문제이다. 철저히 내 안의 문제인 것이다.따라서 용서야말로 자신에게도 최상의 길이라는 것으로 귀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는 것이 마음을 차분히 정리해 볼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의 위대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외에 틱낫한 스님의 말도 인용되고 있다. "만일 당신이 시인이라면 당신은 이 종이 한 장 속에 구름이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나무가 자랄 수 없다. 나무가 없으면 우리는 종이를 만들 수 없다."나는 종이에서 구름을 볼 수 있는 사람인지 자문해보았다. 그런 눈으로 사물을 바라볼 줄 아는가? 경계를 허물고 세상을 상호의존적 시각에서 바라 볼 줄 아는 것. 우리 모두는 어차피 모두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피아의 경계선이 약화되고 세상에 대한 자비심이 생겨 나는 것같다.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 사람에 대한 언급이 두차례 나오는데 작가 '빅터 챈'은 왠지 한국에 대해 냉소적 느낌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본의 얘기는 없어도 한국의 무용수나 도올 김용옥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싶어 반갑기는 했는데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다. 글쎄, 왜 그런 느낌을 받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도 김용옥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는 달라이라마를 만나 대담을 나누고 책을 펴내기도 했는데, 이 '용서'의 내용 중에 그 대화를 위해 달라이라마를 찾았던 상황이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김용옥은 영적인 대화를 위해 찾아온 것 같지가 않다. 교리와 지식을 늘리고 논하기 위해 만난 것 같다. 김용옥은 스스로가 너무나 똑똑해서 못견디는 사람이 아니던가... 베이징 올림픽 무렵 티벳 문제에 대해 다소 온화한 척 했던 중국이 올림픽이 끝나기 무섭게 강성으로 돌아섰고 비폭력 평화적 해결을 주창하는 달라이라마가 두손두발 다 들다시피하는 상황으로 몰려가는 근래의 소식을 접하고 있다. 중국의 무조건적인 팽창정책과 탄압 속에 달라이라마는 어디까지 용서하며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책꽂이 들여다보기 2009/09/26 23:26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자신의 체험을 박력있는 문체로 나타내는 데 특별한 소질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책의 재료가 되는 그 내용, 즉 그녀의 경험 자체가 더 없이 강렬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녀는 월간지 GQ의 기자였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다소 현란하고 과장되었다고 느낄 정도의 말솜씨가 그러한 배경의 훈련 탓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선입견 일까... 처음 읽기 시작했다가 서두가 너무 여성 편향적인 느낌이라 흥미를 잃어 중단했었다. 하지만 문득 편하게 다시 읽혀질 것 같아 집어 들고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혼의 고통을 안고 길을 나선 저자는 이태리에서 먹기, 인도에서 기도하기, 발리에서 사랑하기를 차례로 경험한다. 위의 책표지 디자인이 함축적으로 그것으로 나타내고 있다.이 때문에 이례적으로 원전의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 같다. 디자인이 참 잘된 책표지다. 살면서 문득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순간에 와 있는 걸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저자의 고통스런 이혼은 그런 순간에 시작된 것이다. 이혼의 소송과 극한의 대립을 거치면서 환멸을 느낀 저자는 마음이 망가질만큼 망가지고 떠남을 결심하게 된 것인데 여기까지는 그리 크게 와닿는 느낌은 사실 없다. 더구나 첫 코스인 이태리에서의 나날은 그런 고통에대한 치유의 시간으로서 소소한 일상 들의 묘사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아마도 이쯤에서 내가 읽기를 멈추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매우매우 여성 취향 중심적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은 기도하기 부터였다고 봐야한다. 그것은 아주 작은 깨달음의 시간... 이었지만 더 없이 소중한 느낌이었다. 저자가 고통의 그늘에서 벗어나 점점 건강한 영혼을 찾아가는 여정으로서 시작은 신변잡기적인 에세이같지만 마무리는 구도자의 책같은 느낌이 들어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걸 다 섞어 놓은 듯한 상업적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충분한 성찰 속에 내용이 깊이가 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아주 좋은 말들을 따분하지 않은 시원시원한 문체와 쉬운말로 와닿게 잘 써놓고 있다. 가슴깊은 경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들이다. 정말 잘 쓴 글이라는 말에는 의심에 여지가 없다.
" 매일 같은 옷을 입는다. 나는 그게 그의 유일한 옷이라는 걸 깨달았다. ... 왜 이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그토록 감동하는 걸까? 너무도 광채가 나서 마치 은하수로의 긴 휴가를 마치고 방금 돌아온 듯한 그 얼굴"
저자가 요가 수련을 하려고 방문한 인도의 수련장에서 마주친 소년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문득, 욕심없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삶을 경건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탐욕이 가져다준 번민, 끊임없는 가식... 문득 내가 얼마나 피곤한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이외에 내가 밑줄 긋고 두고두고 다시 보고 싶은 본문 내용들이다. "신앙심이 독실한 사람들은 어떤 보답을 받게되리라는 보장도 없이도 의식을 수행한다. 신앙은 확신없는 근면이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 결말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신념이란 어둠을 향해 정면으로, 전속력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신념이 이성의 영역이라면 그건 신념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신념이란 보거나, 증명하거나, 만질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다.""운명은 신의 은총과 의식적인 자기 노력 사이의 놀음이다. 운명의 절반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절반은 완전히 우리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이 결과에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인간은 단순한 신의 꼭두각시도 자기 운명의 완벽한 지휘관도 아니다. ... 우리는 빠른 속도로 나란히 달리는 두 말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서커스 곡예사처럼 정신없이 살아간다. ... 운명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차 있지만, 반면 내 사법권 안에 속하는 것들도 있다. 나는 분명 복권을 살 수도 있고, 시간을 어떻게 쓸지, 누구와 만날지, 무엇을 먹고, 읽고, 공부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인생의 불행한 환경을 저주로 받아들일 것인지, 기회로 받아 들일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말할 때 쓰는 단어와 목소리와 톤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생각을 선택할 수 있다. ...하루 종일 내 생각을 바라보고 검열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난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한 생각들의 항구가 되지 않을거야' ...더 이상 혹독하고 독설적인 생각은 이 항구에 들어올 수 없다. 여기는 평화로운 항구이며 이제는 오로지 평온함만이 피어나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유일한 통로다.""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복을 일종의 행운, 운좋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행복은 그런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행복은 개인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 싸우고 노력하고 주장하고 때로는 행복을 찾아 세상을 여행하기도 해야한다.자기 행복의 발현을 위해 무자비하게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 행복의 상태에 도달했으면 그것을 유지하는 걸 게을리해서는 안된다.""슬픔과 고난은 불행한 사람에 의해 생겨난다. 내 인생의 불행한 사건들이 내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과 괴로움, 불편함을 가져다 준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자기 방어적이고 나만 이롭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자비로운 선물이기도 하다. 우리의 불행을 깨끗이 털어내는 것은 곧 우리의 임무를 마치는 것""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정의하는 말을 듣고, 이 말들은 거기에 수반되는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데, 그 감정은 끈에 묶인 개처럼 우리 주위를 맴돈다.""떡갈나무를 탄생시킨 것은 동시에 두가지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 첫째는 나무의 시발점이 되어준 도토리다. ... 다른 힘은 어서 빨리 세상에 존재하고 싶은 마음에 도토리를 도와주는 미래의 나무... 떡갈 나무가 탄생한 도토리를 창조한 것은 다름아닌 떡갈나무 자신. ...더 젊고 더 혼란스럽고, 더 힘들었던 그 기간동안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를 끌어 당겨 주었던 건 이 행복하고 균형잡힌 나 ... 어서와 여기서 나를 만나자 라고 말해준 더 나이든 나는 미래의 떡갈나무.4년 전 한밤중 욕실 바닥에서 흐느끼던 젊은 ... 나의 주위를 맴돌던 상냥하게 속삭였던 건 지금의 완전하게 발현된 나"정말 멋진 말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내 마음이 훨씬 밝아질 수 있음을 느꼈다. 밝은 책을 더 읽고 싶다. 마음이 밝아지는 책을 읽고 싶은 이들에게 강추한다.
일상의 발견 2009/09/23 22:01
(1년간 내 손을 타며 곁을 지킨 몰스킨 노트와 비스콘티 만년필)
딱 1년전인 것 같다. 지인으로부터 가죽 커버의 질좋은 몰스킨 노트를 A4사이즈 정도의 큼지막한 걸로 선물을 받았었다. 가뜩이나 손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데다 요즘 누구나 그렇지만 손으로 글을 잘 쓰지 않는지라 일정이나 업무회의의 간단한 메모를 작성하는 다이어리 정도라면 모를까 큼직한 이 노트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독서노트를 써보면 어떨까 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건 좋아하지만 일일이 읽은 내용을 노트를 작성한다는 것이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수필집 '깊이에의 강요'에서 문학적 건망증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서 언급한 바도 있지만, 책을 덮기 무섭게 잊어버리는 것들이 많아 허망하기 그지 없기도 하다. 좋은 노트에 좋은 펜을 갖춘다면 책을 읽고 긁적이는 버릇을 만들어보고 이를 유지할 수도 있겠다하는 용감한 생각을 하고 9월30일자를 처음으로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간 중간 학창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출력물 같은 것으로 스크랩을 해서 붙이기도 하고... 특히, 저자의 얼굴이나 저자가 인상깊게 언급한 대상에 대한 사진을 찾아 붙이니 더욱 좋았다. 이것은 오프라인의 은밀한 내면적 블로그라고 봐야 할 것이다. 중간 중간 몇번 멈추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쓰는 즐거움을 되찾기 시작했고, 이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성하는 매수가 넘어가면서 거의 1년이되는 올 9월말이면 한 권을 잘 마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결국 9월 22일 밤이 되어 마지막 페이지를 쓰게되었다. 페이지들을 넘겨보면서 책의 감상과 인상적 부분들을 읽어보니 기억이 새롭고 그 때의 감흥이 그대로 되살아 난다. 독서를 취미를 가지는 이들에게 독서노트는 정말 값진 결과물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물론 중간에 노트와 요약에 집착하여 독서 자체가 스트레스처럼 변질 된 경험도 있다. 이것은 과한 노트열에서 기인한 부작용이며 독서라는 본질의 흥미를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소중한 독서의 경험을 건망증이라는 허망한 말에 날려 버리지 말고, 진정한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노트는 진정으로 우리의 독서 생활에 정수를 남겨줄 수 있다. 물론 나는 또다른 질 좋은 노트를 준비해서 두번째 독서노트를 시작할 생각이다. 가급적 질이 좋아 펼칠 때마다 글을 쓸 때마다 느낌과 기분이 좋아지면 좋을 것이다. 게다가 필기구도 좋은 것을 준비해보면 금상첨화 일 것이다.
책꽂이 들여다보기 2009/09/11 21:15
"요네하라 마리" 어디에선가 그 사람의 책을 보았다 싶었더니 예전 교보문고에 갔을 때 봤던 책의 저자였다. 이름이 별나다 싶어서인지 기억에 남아있던 것이다. 당시에 내가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고 다니던 코너는 책에 대해 쓴 책들, 소위 서평같은 것들이 꽂혀 있었던 곳이었는데 이제와서 찾아보니 '대단한 책'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았던 것 같다. 저자가 주간지에 연재하던 서평과 독서 일기 같은 것들을 모아 출간한 책이었다. 하루에 7권씩 20년을 책을 읽은 열렬한 독서가로 알려진 '요네하라 마리'. 다소 과장 됐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하여간 대단한 독서가 임은 분명한 것 같다. 본래 러시아어 통역사로서 유명한 저자는 글을 워낙 잘 써서 소설이나 에세이 상을 여러차례 받아 인정받는 작가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토록 책을 많이 읽었으니 도가 텄을 것이다. 당시 '대단한 책'을 사지는 않았고 근래 인문 서적의 신간 코너에서 '미식견문록'을 보며 몇 번이고 그냥 지나치다가 왠지 마음이 끌려 사게 된 것이다. 사실 음식에 너무 국한된 책같고 풍물을 소개하는 잡기적인 책같아 별로 내키지 않았기에 처음에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러나 내가 오래전 만지작 거렸던 그 책의 저자라는 생각으로 연결이 되자 그 이력을 감안할 때 내공이 장난 아니겠다. 사야할 운명으로 내앞에 다시 나타난게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다. 막상 책을 펴들고 읽기 시작하니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그 풍부한 배경 지식과 위트있는 전개, 무엇보다도 글을 편하고 재미있게 써서 읽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정말 쏙 빠져들어 맛깔진 음식 뿐만 아니라 글 맛을 느끼게 한다. "맛있는 정도가 아니다. 이렇게 맛있는 과자는 난생 처음이다. 만드는 법은 터키 꿀엿과 비슷할 것 같지만 확실히 그것보다 백배는 맛있다. 게다가 처음 맛보지만 처음같지 않고 왠지 그리운 맛이다. ... 딱 한 입. 그 한 입에 나는 할바에 홀딱 반했다. 아아, 할바 먹고 싶어라.""18년 전에 단 한 번 먹어본 잊을 수 없는 그 맛! 아, 언제 다시 먹어볼까나. ... 왔다! 어느새 물고기가 걸려든 것이다. ... 팔딱 팔딱 몸부림치더니 세번째 팔딱하기 전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만져보니 딱딱한 몽둥이같다. ... 요리사는 물고기 덩어리를 양손으로 잡더니 조리대에 고정된 대패 위를 몇 번 왔다갔다 했다. 꼭 목수가 대패질하는 모습이다. ... 이 '대팻밥'에 얇게 썬 양파를 버무려서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서 먹는다. 입에 넣는 순간 '대팻밥'이 사르르 녹으며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입속에 번져 나갔다. 아, 이 행복.""이런 먹보가 며느리로 들어와서는 집안 말아 먹겠다고 걱정하셨겠네.""아니, 당신 아들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그렇게 먹어댈리가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삼촌은 눈을 감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역 도시락은 팔각 도시락으로 해라..." 내게는 이 말이 그 일주일 뒤 세상을 뜨신 삼촌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 되었다."이 책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웃음과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마음이 푸근하고 그러면서도 새로운 얘기가 많이 들어 있어 더할 나위없이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책의 서두와 표지에 '로쟈의 인문한서재'의 저자 이현우가 "요네하라 마리의 컬렉션에 한 권을 추가하게 됐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또한 저널리스트 고종석은 "나는 요네하라 마리의 충성스러운 독자다. 생 전에 한 번 만나봤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숭배자이기도 하다"라고 하고 있다. 뭔가 '요네하라 마리'의 광 팬 분위기가 느껴진다. '알랭 드 보통'이나 '수잔 손택',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소위 오타쿠를 몰고 다니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물론 나도 '요네하라 마리'가 좋아졌다. 그의 책이 출간 된 것을 찾아 보니 4권 정도가 나온다. 다 사서 봐야겠다. 안타까운 것은 1950년 생인 저자가 2006년 56세를 일기로 암때문에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저작을 읽을 기회는 없는 것이 미리부터 아쉬움으로 남는다. 예전에 '이우환'의 '시간의 여울'을 읽었을 때 그 번역자 '남지현'이 후기 맨 마지막에 쓴 글이 떠 올랐다. "평소 보석같은 책을 발견했을 때, 한 장 한 장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기를 쓰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던 기억들..." '미식견문록'은 어느새 그 반열에 올라 있었다. 정말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여행자의 조식'은 미식견문록의 원저로 생각된다)
책꽂이 들여다보기 2009/09/06 23:31
아주 일본 스러운? 책이다. 책의 디자인도 그렇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이라고 되어 있는 이 책은 예전에 '아니 프랑수아'가 쓴 '책과 바람난 여자'에서 극찬을 한 책이다. 본래 제목은 '음예예찬'이라는 한자어 인데 '음예'라는 말이 그늘의 어두움 같은 것을 얘기하지만 딱히 쉽게 표현할 말을 찾는 것이 어려워 제일 느낌이 가까운 '그늘'로 제목을 번역했다고 역자는 쓰고 있다. 뜻은 어렵지 않은 것 같은데 말 자체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러다보니 소개하는 데도 제각각이다. '책과 바람난 여자'에서는 '어둠의 예찬'이라는 표현을 썼다. 뜻은 더 정확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말의 느낌이 영 마땅치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음예'는 그리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진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늘진 컴컴함의 멋이라고 할까. 이 책은 1930년대에 쓰여진 것이다. 일본의 옛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일본 고유의 미와 미의식을 세심하게 음미하고 소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상의 아주 사소로운 것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번역자 '고운기'는 국문학을 전공한 분인데 그런 배경 탓인지 시종일관 느껴지는 어투가 아주 옛스러운 것이 이 책의 분위기와 내용 딱 맞게 번역되어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과 문체가 잘 어우러지는 맛이 난다. 잘된 번역이다. 책의 중간 중간 저자가 일본 특유의 전형적인 느낌을 드러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름대로 자신의 주장과 고집스러운 얘기를 공간을 할애해서 주욱 해놓고 끝에 가서는 사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라는 식으로 살짝 옆으로 비켜서는 인상을 준다. 뭐랄까 도대체 자신의 주장이 어떻다는 건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 수 도 있는 애매한 느낌의 마무리다. 말미에 중립적 입장으로 갑자기 돌아서면서 저자의 시각은 아주 균형 잡힌 것이라는 것을 환기라도 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약간 거슬리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프로스트적인 심미안은 훌륭하다. 옛 가옥의 실내 모습, 어두운 조명 속에서의 공연, 일본의 옛 여인을 어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써 내려간 글을 읽노라면, 집안을 등을 당장이라도 꺼놓고 작은 불빛 하나만 살려 책을 다시 펴들고 싶게 만든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실제로 몇 번이나 그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언제나 실제로부터 발달하는 것으로, 어두운 방에 사는 것을 부득이하게 여긴 우리 선조는, 어느덧 그늘 속에서 미를 발견하고, 마침내는 미의 목적에 맞도록 그늘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다소 꿈보다 해몽에 가까운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이 말이 이 책 '음예예찬' 전반에 흐르는 기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검게 물들이고 얼굴과 손을 빼고는 철저하고 깊숙히 옷과 어둠이라는 테두리에 감춘 옛 일본 여인의 모습을 저자의 어머니로부터 떠올린다. 어둠 속에서 감추어져 영영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실체는 사실상 몸뚱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이미지가 반복되어 나온다. 이외 다소 신변 잡기적인면이 두드러지고 작가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 얘기로 흘러가는 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과 해학적인 풍경을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는 분위기가 재미를 배가 시킨다. 그로태스크 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소위 공중에 걸쳐 있는 듯한 화장실 얘기, 강변 절벽에 접한 음식점 화장실이었는데 그 화장실 아래는 나비가 훨훨 날아 다니고 사람들이 왔다갔다해서 변이 허공을 지나 그 아래로 낙하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늘에 대한 얘기를 한 참 하다가 느닷없이, 요시노라는 지방의 토속음식으로 얼린 연어와 감잎을 이용해서 만드는 스시 부분이 나오는데, 배가 한 참 고픈 상태에서 읽는 바람에 너무너무 먹고 싶은 것으로 상상 속에 남게 되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나라에 유명한 식당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것을 맛보러 일부러 갈 일이야 없겠지만 언제가 기회가 되면 꼭 맛보고 싶다.
책꽂이 들여다보기 2009/09/05 20:35
서점에 드나들 때 눈에 띄던 스코트 니어링, 헬렌 니어링 부부의 책들... 그저 막연히 고집스럽고 괴팍한 극단적 자연주의자 정도로 치부했었다. 요즘 많이 유행하는 웰빙, LOHAS의 원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막상 내용을 접하고 보니 소박하고 온화한 느낌이 피부로 전해진다. '소박한 밥상'이었던가? '헬렌 니어링'의 명성을 처음 들었던 책이었다. 나는 무슨 책을 읽어볼까 하다가 그 부부가 처음 자급자족의 생활을 시작하며 그 결과를 쓴 것이 원전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화로운 삶'을 택했다. 이 책은 대단히 실질적이며 실용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무슨 거창한 신념이나 형이상학적 얘기를 하려는 책이 아니었다. 애초에 '버몬트 숲속에서 산 스무해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보고 예상은 했었다. 물질의 풍요로움보다 정신과 영혼의 풍요로움을 추구한다는 것. 현대인이 소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노동을 제공하고 금전을 받아 활용하는 간접적인 방식인데, 그런한 서비스와 노동을 자급자족의 농업 즉, 자신의 먹거리를 위해 순수하게 투입하고 초기 농경사회처럼 간다면... 훨씬 여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고 고품질의 먹거리와 삶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극도의 효율화된 현대 산업사회가 왜 동일한 노동과 수고를 주고도 너 나은 삶의 질을 보장 못하고 있는가? 대량 자동화 생산과 효율성으로 인해 먹거리 자체의 질은 많이 희생되었다. 결국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마이너스로 갔다는 얘기다. 그럼 그 효율이 결과는 어디로 갔는가? 소수에게 불균형한 혜택이 가는 것이다. 잉여 생산과 그에 따른 부의 창출은 쏠림의 결과로 귀착되는 것이다. 이는 초기 자본주의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착취와 부의 편중, 시장에서의 끊임없는 유혹으로 부의 양극화가 반복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리라. 니어링 부부는 결국 "잉여"를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내가 우리가 먹을 것 직접 생산해 먹으면 문제가 없다. 남을 만큼도 아니고 필요한만큼만. 이외의 남은 시간은 생산이 아닌 오락이나 유희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것이고 그만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압력과 부당한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가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급자족의 생활에서 먹는 것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겠지. 그 부분을 읽으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것이 쓰여진 시기에 대한 자각에서였다. 내용만 놓고 보면 요즘 시대에는 그야말로 뻔한 얘기 일 수 있다. 친환경, 유기농, 청정 먹거리에 대해 요즘 얘기는 나올만큼 나왔고 어느 정도 공감대도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1932년부터 20년간 지낸 기록 이니까 잘해야 50년대 초반에 쓰여진 글이다. 그 시절에 얼마나 선구적으로 시대를 앞서 갔는지 놀라울 뿐이다. 60년 이상된 오래된 경험과 얘기를 보면서 우리는 비로서 절실하게 느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자주 사색에 잠긴다. 나의 최근 몇 년간을 뒤돌아 보며 뭘 그리 서둘러 댔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 오른다. 나의 사업은 순발력, 빨리 빨리로 성공했다고 느끼지 않았던가? 분명 그 배경이 강하게 작용했으리라는 자조섞인 변명도 해본다. 니어링 부부의 대처는 그런면에서 가슴에 깊히 와 닿는다. 충분하다 싶은 시간을 가지고 느긋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서두를 것 없다. 때에 맞춰서 될 일은 되게 끔 되어 있다. 물론 의지와 준비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이런 면에서 왜 양평집을 짓기 전에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책의 한계점이 많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니어링 부부는 처음 시작부터 어느 정도의 자금이 있었다. 그만한 자금이 자급자족이 되는 땅과 시작할 기반을 제공해 준 것이니까. 그리고 두 부부와 소수의 동조자 외에 실질적인 공동체나 이에 준하는 어떤 확산을 이끌어 내지 못한 부분도 또 다른 한계로 보인다. 최근에 와서 유럽이나 북미 등지에 이러한 형태의 공동체가 다 수 나타난 것 같기는 한데 당시에는 받이 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을 것 같기는 하다. 이외에 자녀 교육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삶의 형태라고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이 부부는 자식이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은 몸소 실천해서 보여주고 증명한 것 같다. 스코트 니어링은 100살, 헬렌 니어링도 90살이 넘게 산 걸 보니... 이들의 책을 추가로 더 사볼 생각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음식을 먹는다. 다만 좋은 것을 먹는가. 나쁜 것을 먹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자기 밭에서 나는 채소와 과일을 먹는 사람은 자기 밭을 갖고 있지 않은 부자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먹는다. -루던(밭농사 백과사전)-""문명이란 사실 불필요한 생활 필수품을 끝없이 늘려가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가장 조화로운 삶은 이론과 실천이 생각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삶이다. ... 순간 순간, 날마다 날마다 해마다 어떠한 시간이나 자기가 더 바람직하게 여기는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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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들여다보기 2009/09/04 22:38
가슴으로 읽어야 할 책이다. 얼마나 몰입해서 읽었던지 마지막 장을 덮고 가슴이 뭉클, 눈물이 글썽했다. 책을 읽으며 눈물이 나다니... 난생 처음이다. 부모를 여읜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인디언 조부모를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성장하는 이야기로 술술 읽히면서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 드는 책. 체로키 인디언들의 삶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 한마디로 뭐랄까 자연과 순응하며 욕심내지 않고 배풀줄 아는 삶. 영혼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 우리가 일상에서 강조하는 여러 삶의 가치들을 결코 작위적이거나 복잡 다단하게 어렵게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일상의 모습, 삶의 모습 속에서 말하고 있다. 태초의 원초적 인간의 가장 적절한 모습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재출간의 우여곡절을 겪은 이 책의 서문을 보면 읽기 전과 후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고 써 있다. 과연 얼마나 그럴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얘기요. 가슴뭉클한 감동의 얘기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하나는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이다. ... 자기 몸이 살아가려면 누구나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전혀 다른 또 다른 마음이 있다. ...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만일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부리고 교활하게 ...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 들어서 밤톨보다 작아지게 된다. ...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그보다 커지면 영혼의 마음은 땅콩만하게 줄었다가 결국에는 그것마저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 그런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되고 만다."방울뱀을 코 앞에 마땋드린 손자를 보고 있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일까? 산에서 평생을 살아온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숲속에서 생존과 대처법에 대해 전문가였다. 그런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가 엎어져 방울뱀과 코를 맞대고 물리기 직전에 할 수 있는 행동이 말이다. 그 뱀을 치워버리거나 걷어 낼 수 있는 여러가지 조치를 할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 손자가 물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치명적으로 얼굴을... 할아버지는 기꺼이 그 사이에 손을 갖다대고 꼼짝않고 물릴 때까지 기다린다. 그것이 손자가 안물리게 하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경험과 지혜와 사랑의 결과 였을 것이다. 성장 환경을 문제 삼아 소위 '정부'에서 나온 사람들이 고아원으로 끌고 가고 말미에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 둘씩 잃어가는 안타까움까지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느낀 문제점은 결국 이 꼬마 주인공이 연로한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언제까지 보호받을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10살을 채 넘기자마자 또다시 고아가 되어 산속에 홀로 남고 결국 떠나게 되는 설정에서 역시 답답함을 느낀다. 고아원의 인성 말살적 환경에서 자라는 것과 비교할 가치는 별로 느끼지 않지만 사랑하는 손자를 고아원에서 데려온 할아버지,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죽은 뒤 또다시 산속에 홀로 방치하는 것 아닌가? 이외에, 인상적인 것은 모든 것이 야생으로부터 채집된 먹거리들인데... 먹어보고 싶다. 도토리 가루와 호두, 밤으로 만든 쿠키. 근데 어디까지가 실화였을까? 사실 이 책을 그토록 몰입하여 감동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읽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읽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 끝내고 후기를 보면서 픽션적인 부분이 섞여 있는 걸 알고 적잖이 실망했지만 드라마를 보면서도 우는데 뭐 그게 대수 일까 싶었다. 저자 '포리스트 카터'는 70년대에 타계하여 이 책이 유명세를 타기도 전에 고인이 되고 말았는데, 그가 KKK단과 연관되어 일을 하는 등 인종편견적인 전력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고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오프라윈프리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았는지 그의 추천 책 목록에서 빼버리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프라도 말했듯이 책 자체가 참 좋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리틀 트리"라는 원제에 맞춰 영화로 출시된 것도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것도 구해서 봐야겠다. 가슴이 따스해지는 이 책을 정말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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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들여다보기 2009/08/29 21:49
'Joseph Conrad'의 "어둠의 심연 (원제; Heart of darkness)"을 읽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으로 유명한 책이다. 사실 그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을 집중해서 제대로 봤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전부터 그 영화가 인간 내면의 사악함을 얘기한다는 해설에 대해서 들었고, 나는 여기에 대해 어떤 이해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난해한 얘기군! 하고 말았던 것 같다. 19세기 말에 쓰여진 이 소설의 표지에 영화의 장면을 연상케하는 헬리곱터가 떼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영화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거 겠지. 여러 번역본이 있지만 몇달 전 "마의 산"을 읽은 '을유 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골랐다. "마의산"을 워낙 잘 읽은 탓에 그 시리즈가 왠지 내공이 있어 보였고 그만큼 번역이나 제본의 충실도를 신뢰하기 때문이리라. 문명의 인간, 그 중에서도 지식인이자 인격자로서 충분히 인정받아온 인격자(심지어는 친한 이들에게서 추앙받을 정도까지)가 아무도 없는 비 문명 상태에 던져졌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인격자로서의 품위?와 도덕성을 유지할 것인가? 문명과 도덕, 인격의 가벼움과 본질적인 허망함, 인간 본성이 얼마나 간단한 과정과 이유로 본디 그래야만 한다는 소위 당위성에서 쉽사리 무너져 내리는지 얘기를 하고 있다. 야성, 야만이 우리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표면에 떠올라 발현될 수 있는 준비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글쎄, 나도 그럴까? 이 책을 읽은 후에 비로소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콩고강 깊숙한 상류로 들어간 대령의 야만성이 무엇을 얘기하는 건지 얼핏 알게 된 것 같다. 작가, 조셉 콘래드의 얼굴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천재라기보다 고집스러운 외골수의 분위기가 더 느껴진다. 20대 초반에 영어 한마디 못하는 체로 영국에 들어간 그가 30대에 영미 문학의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는 이런 소설을 쓰다니 가히 경이롭다. 본문의 내용을 몇가지 인용한다. 홀로있는 순간에, 지켜보는 경찰이 없는 절대 고독의 순간에, 정적의 순간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속삭여 줄 친절한 이웃의 경고 목소리가 없는 절대 정적의 순간에,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는 발길이 태고의 어떤지역으로 사람을 인도할 것인지 자네들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라네,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자신의 타고난 힘에, 헌신할 수 있는 자신의 힘에 의존해야 하네철저한 야만성이 그를 포위해버린 것일세, 숲속에서, 정글에서, 미개인의 가슴엣 꿈틀거리는 야성의 신비한 생명이 말일세,..... 하지만 거기에는 그의 마음에 호소하는 매혹적인 힘이 있기도 하지, 혐오스러운 것이 뿜는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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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들여다보기 2009/08/27 19:20
'애덤 고프닉'이라는 미국인이 파리에 살면서 프랑스의 내면 특히 파리에서의 삶을 들여다 본 책이다. 이 책이 출간되자 마자 사들였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표지에 '알랭 드 보통'이 "최근 수년간 나온 프랑스에 관한 책 중 가장 멋진 책"이라는 찬사가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작년 봄에 사서 나는 책장 위를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읽지 않고 묵혀 두게 되었는데 아마도 내가 파리 그 자체에 대해 확 달려 들 정도의 관심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추천도 매력적이고 분위기가 언제고 읽을 것 같았기에 몇번이고 내 손을 탔었고 결국 이번에 읽고야 말았다. 단순히 외지인이 어느 지역을 둘러보며 쓴 기행문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100% 현지인처럼 동화된 것도 아니다. 타지에 수년간 머물면서 외부인의 시각이기는 해도 철저히 현지의 언어와 문화 특히 언론인으로서 사회 전반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어 아주 인상적이다. 저자는 프리랜서 기자였다. 생각해보면 기행문이라는 게 이방인이라는 입장에서 화자 내면의 문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때문에, 물과 기름같은 둥둥 떠있는 공허함까지 느껴 지는 글들이 많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은 깊숙히 들어가 있는 책이었다. 게다가, 나의 머리를 신선하게 자극한 부분이 있었다. 딱딱해지기 쉬운 내 사고의 유연성을, 그 한계를 넓혀야 한다는 자각. 이는 내가 평소에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서 내세우고 싶은 지론 중의 하나이다. 일상 속에 나의 시각은 자꾸만 고착되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가장 균형잡힌 시각인양 느껴지게 된다. 내 나이가 또 그럴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험하다. 에펠탑의 파업을 야기한 대목을 읽으면서 그랬다. 에펠탑의 엘리베이터를 조작하는 직원이 고객의 의견을 즉시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자 직원들이 들고 일어나 파업을 한다. 나에겐 이미 고객 제일주의, 돈을 지불하는 자의 요구를 당연히 최우선으로 만족시켜야 한다는 미국, 일본식 사고가 가장 중요한 척도로 자리 잡지 않았는가?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신성한 명제다. 그 누구도 반기를 들면 안되는 것이다. 예전부터 파리에서 가게를 들어가면 손님에게 불친절하고 도도한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나역시 혀를 끌끌 차며 그런 기본이 문제가 있으니 성장의 한계를 맞고 있는거 아니겠는가... 하고 냉소적으로 생각했었고. 그러나, 파리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달랐던 것 같다. 고객이나 서비스하는 이나 어차피 그 상황에서 그럴 뿐 각자 서로 존중해야 할 직업인이고 결국 공급자의 입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아주 근본적인 부분의 관점이 달랐던 게 아닐까?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말도 안돼에서 시작해서 흠... 그런면이 있구나'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했다. 나의 머릿속이 말랑말랑해지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미국인들은 어떤 것이라도 돈으로 구입할 수 있는 완결된 사회를 원한다..... 반면에 프랑스인들은 모두가 자기 완성을 향해 일을 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따라서, 남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결국 혼자 있도록 두지 않는 파리 사람들.... 군중에 파묻힌 채.... 나누는 익명성은 결국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파리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은 많았지만 진정으로 혼자이기는 힘들었다."대도시에서 어느 누구도 임의의 타인에 대해 개의치 않는 철저한 개인주의. 삭막함의 대표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 "익명성"을 저자는 그리워하고 있다는 게 참 재미있다. 그렇다 저자는 뉴욕 출신이다. 돌이켜보건데 나 자신도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속에서 익명성에 파묻혀 편안함을 느끼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편안함은 있다. 문득, 오래전에 읽은 스페인 마요르카 섬의 얘기 "뽀까뽀끄"가 추구하는 바와 정반대의 그것을 느꼈다. 낙천성과 즐거움이 극대화된 미국적 스포츠인 농구(쉴 틈 없이 점수가 계속 난다)와 달리 툭하면 0:0 무승부로 끝나고 아무리 경기를 잘해도 점수가 안나면 지는 축구를 과연 오락의 대상으로 적절한지 묻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축구가 우리의 현실, 우리의 인생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그의 시각이 신선하다. 외국인에게 관대하게 개방된 의료시스템, 전통 있는 레스토랑을 보존하기 위한 의기투합의 모습 등이 기억에 남는 다. 짧은 기간을 낯선 땅에 살면서 이토록 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게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말미에 가면 저자가 애초에 파리에 가면서 세계주의를 부르짖는 보편주의자로서 땅을 밟았지만 결국 그 속에 동화되지 못하고 한계를 느끼는 우울함을 얘기하고 있기도 하다. 여하튼 잘 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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